옥타비아 버틀러의 킨을 읽고, 이 작가에 빠졌다. 최초 흑인 여성 SF작가라고 한다. 어슐러 르귄이 발굴한 작가라 더 소중할까. 다시 말하지만, 이 작가 너무 사랑한다.
킨을 처음 읽었을 때 중간쯤 읽고 다른 일 때문에 잠시 멈춰야 했는데 그 다음이 너무나 궁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너무 신나고 흥분했었던 기억과 이 책 읽지 않은 사람 부럽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 책 사랑했네
이후, 다른 책도 읽었는데 이 책만큼의 느낌은 아니었지만 잔잔하게 좋아하는 작가로 등극. 이 작가의 책이 나오면 족족 읽어보고 있다.
야생종, 블러드 차일드(단편집), 이번에 출간한 쇼리까지 읽게 되었다. 다른 책도 많으나 번역된 책은 4권이다.
<킨>
킨의 시작은 충격적인데, 프롤로그 처음에 "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마지막 여행에서 팔 하나를 잃었다. 왼팔이었다"라고 시작한다. 아니 이게 무슨 여행이길래 팔을 잃었지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벽에 끼어버린 체 왼팔을 잃어버린 일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과거와 현재를 오고 가는 타입 슬립 물이다. 그리고는 여러 장이 지나서야 주인공이 흑인 여성임을 알았다. 나도 이제까지는 흑인을 디폴트로 두고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연히 백인 여성을 생각했다는 것을 자각했다.
SF이면서도 과학 용어 하나도 등장하지 않은 체, 과거로 돌아가 노예 시대로 흑인 여성이 돌아가 채찍질을 맞으며 노예 생활을 적응하면서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교육을 그들에게 해주는 과정, 과거에서 현재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은 죽음의 느낌이 들 때 현재로 돌아갈 수 있는데 처음에 채찍질을 맞았을 때 죽을 것 같은 느낌으로 현재에 다시 돌아오게 된다. 그 이후에는 채찍을 맞았을 때 죽지는 않겠구나라는 생각으로 현재로 돌아올 수 없었던 것
또, 채찍을 피하기 위해 노예로서 복종하는 모습을 보면 어떻게 노예가 복종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는지를 이해하게 된다.
뒤에는 더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주인공은 여성에게 글을 가르치고, (중간쯤에 가면 남편도 함께 과거로 오게 되는데 직접 읽어보시라...)
<블러드 차일드>
단편집으로 소설도 있고, 에세이도 있는데 표제작인 블러드 차일드는 외계종과 인간의 접합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야기지만 공생의 관계를 짧게 그린 이야기다. 외계종을 만나 아이를 낳아야 하지만(가족을 대표해서, 그렇게 되는 경우 가족들은 먹고살기에 편해진다), 정작 그 사랑에 빠진 인간은 외계종과의 관계에 사랑을 느끼는 소설
이 단편의 다른 부분도 좋았지만 내가 좋아하는 부분은 마지막에 나오는 <긍정적인 집착>이라는 에세이. 그녀가 흑인 여성으로 또 SF작가로 글을 쓰면서 생각한 것을 정리한 글인데. 너무 희망적이라 좋은 것이다. 나도 긍정적인 집착으로 하고 싶은 일에 대해 매진할 것.(그러나 하고 싶은 일을 아직 못 찾았다는 게 함정)
이모와 나는 이모네 부엌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모는 맛있는 냄새가 나는 요리를 하고, 나는 식탁에 앉아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호사였다. 집에서라면 어머니가 요리를 거들게 했을 것이다.
"크면 작가가 되고 싶어요." 내가 말했다.
"그러니? 흠, 그거 좋구나. 하지만 직업도 구해야 할 거야"
"글을 쓰는 게 제 직업이 될 거예요"
"글은 언제든 쓸 수 있어. 좋은 취미지. 하지만 밥벌이도 해야지."
"작가로 벌죠."
"바보 같은 생각 말아라."
"진심이에요."
"얘야... 검둥이는 작가가 될 수 없어."
"왜요?"
"그냥 안 돼."
"아니에요, 될 수 있어요!"
나는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를 때 제일 단호했다. 열세 살이 되도록 읽은 인쇄물 중에 흑인이 썼다는 글은 단 하나도 없었다. 이모는 어른이었다. 나보다 많이 알았다. 이모가 옳으면 어떻게 하지?" (p.264)
미국 문화의 현실과 상충하는 마음 아픈 불문율이 하나 있는 것 가다. 당신이 흑인으로서, 흑인 여성으로서 정말로 열등할 수도 있지 않으냐는 의심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불문율이다. 충분히 똑똑하지 않을지도, 충분히 빠르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당신이 원하는 일을 할 만큼 뛰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의심해선 안 된다..... 그러나 물론 당신은 의심할 것이다. 당신은 당신이 누구 못지않게 뛰어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 사실을 모른다 해도 그 점을 인정하지 말아야 한다. 근처에 있는 누군가가 그런 사실을 인정하면, 얼른 그들의 자신감을 북돋아서 입을 다물게 해야 한다. 난감한 대화가 되겠지만 말이다. 다부지고 자신감 있게 행동하고, 자신의 의심에 대해서는 말하지 말라. 의심을 상대해본 적이 없다면 영영 의심을 없애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상관없다. 모두를 속여라. 자기 자신까지 속여라.
나는 나 자신을 속일 수 없었다. 나는 내 의심에 대해 많이 말하고 다니지 않았다. 나는 조급한 위로와 칭찬을 바라지 않았다. 하지만 생각을 많이 했다. 같은 생각을 하고 또 했다. 그런데 내가 누구란 말인가? 내가 글을 통해 하는 말에 왜 누가 관심을 기울여야 하나? 나에게 할 말이 있기는 한가? 맙소사, 나는 SF와 판타지 소설을 쓰고 있었다. 당시 직업으로 SF를 쓰는 작가는 거의 백인 남자였다. 아무리 SF와 판타지를 사랑한다 해도 내가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글쎄, 어쨌든 그만둘 수 없었다. 긍정적인 집착이란 두렵다거나 의심이 가득하다는 이유만으로 멈출 수 없다는 뜻이다. 긍정적인 집착은 위험하다. 그것은 아예 멈출 수 없다는 뜻이다(p.272)
<야생종, 쇼리>
쇼리는 야생종과 느낌이 비슷하다.
야생종도 종을 개종하기 위한 내용인데 (죽지 않는 종을 만들기 위한 작업), 쇼리는 이니(인간이 드라큘라라고 부르는)종은 야간에만 활동할 수 있고 인간의 피를 섭취하여 500년을 살아가는 종이다. 이 이니에 의해 흡혈을 당한 인간은 이니가 뿜는 침에 의해서 젊음을 유지할 수 있다. 그러면서 이니를 위해 일하는 것이지(노예가 아니고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렇게 이니족은 조그마한 집단을 형성하며 지낸다. 첫 장은 쇼리가 동굴에서 자신이 무엇인지를 인식하지 못한 채로 사슴을 뜯어먹으며 잠을 자고 일어나, 눈도 뜨지도 않다가 점점 눈이 떠지고 자신의 흉터를 인식하지만 얼마 후에 흉터가 없어지는 것을 느끼며 동굴을 벗어 마을로 내려와서 차를 세우다가 라이트라는 인간을 만난다. 그러면서 쇼리는 이니족이다. 자신의 이름도 몰랐지만 자신을 찾아가는 이야기로 이니는 인간과 이니족의 혼종으로 낮에 활동을 하기 위해 인간과 이니족의 유전 실험을 통해 태어난 이니족이고, 이걸 반대한 다른 이니 공동체에서 살인을 했던 것이고 그로 인해 쇼리의 어머니족과 아버지족이 모두 몰살되었다. 그걸 추적하며 재판하는 과정까지가 이 책의 주요한 내용이다.
이 작가는 종과 아종의 결합과 공생 관계를 그리는 것이 많았는데 (결국은 한 종족은 노예제와 비슷한 느낌이지만, 결국은 다른 종들보다는 편하다는 느낌을 주는 혜택 - 그러나 노예인 것처럼 느껴지는 관계), 왜 이런 관계를 자주 그린 걸까라는 생각, 유전 편집을 통한 우월하거나 영생을 누리는 종족에 대해서도 생각이 많아진다.
우리는 외계인이 나타나면 받아들일 수 있을까? 외계인과 조화로운 세상을 만들어갈 수 있을까?
추가로 내가 좋아하는 영상 - 왜 옥타비아 버틀러를 읽어야 할까?
https://youtu.be/X6YI8lsjJJ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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